우리는 왜 카메라를 들고 밀양에 갔을까 (『밀양, 10년의 빛 (Listen to the City, 2015)』들어가는 글2)

2017-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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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카메라를 들고 밀양에 갔을까


85번의 기억은 강렬했다. 동트기 전 깜깜한 새벽부터 포클레인 밑으로 들어가 쇠사슬로 몸을 묶고 누워버린 할머니들, ‘식사도 못 드시고 화장실도 못 가셔서 어떻게 하냐’고 걱정하던 한전 직원들.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할머니들을 에워싸고 포클레인에서 뜯어내던 한전 직원들, 공사장 흙 담던 자루에 할머니를 ‘담아’ 나르던 그들! 처음 올라간 송전탑 공사 현장에서 평범한 사람들의 간악함을 목격하고 마음이 내려앉았다. 이런 식으로 만들어내는 전기를 쓰는, 지위가 다른 국민이나 계급이 따로 있어서 저러는가 싶은 일이 밀양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을 첫날 알아버렸다. 여기도 평택 대추리나 제주 강정마을처럼 만만치 않은 곳이구나. 보기 좋은 사진 찍기를 기대하면 안 되는 곳이로구나.


 그런데 우리는 왜 카메라를 들고 밀양에 갔을까. 몇 년 전에 본 영화나 기차를 갈아탈 때 잠깐 발을 디딘 것이 기억의 전부일 뿐인데. 2012년 1월 이치우 어르신 분신 소식을 접한 뒤에야 송전탑 때문에 밀양에서 큰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됐다. 2013년 5월의 처절한 싸움을 언론을 통해 본 뒤에는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건 부산 한진중공업 안 85호 크레인 밑에서도 느꼈던 불편함이다. 강정의 구럼비가 폭파되는 장면을 보면서도 느꼈던 불편함이다. 평택 쌍용차 옥쇄파업 현장에서도 느꼈던 불편함이고 용산 남일당 건물에 남아 있던 그을음을 보면서도 느꼈던 불편함이다. 그런 불편함 때문에 사람들은 희망버스를 타고 사진가들은 카메라를 드는 것 아닐까. 경찰과 싸우고 한전 직원들한테 모욕 당하는 고통스런 모습을 찍으면서 그것으로 대단한 무언가를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사진으로 대단한 무언가를 할 능력도 없다. 한 시간 넘게 땀을 뻘뻘 흘리며 오른 109번 현장 깊은 산 속에서 경찰과 부딪치고 있던 주민들이 ‘언론’이 그곳까지 온 건 처음이라고 반길 때 뭐라도 도움이 될 수 있구나 싶어 작은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을 뿐이었다. 밀양에 왜 갔느냐고 묻는다면 이 정도밖에 할 말이 없다.


 찍는 사람도 또렷하게 이유를 말할 수 없는데 찍히는 사람은 얼마나 탐탁지 않았을까. 동료 사진가와 함께 127번 농성장을 가던 길에 한전 직원의 출입을 막으려고 지키고 있던 한 주민으로부터 호된 질책을 받았다. ‘우리는 목숨 걸고 싸우고 있는데 당신들은 예술 작품 찍으러 온 것 아니냐’고. 한전 직원이 아니라는 것만 밝히면 무사히 통과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가, 꿀밤을 맞을 거라고 예상하고 있다가 난데없이 망치로 맞은 느낌이었다. 의도야 어찌 됐건 때로는 채증하는 경찰로, 때로는 끄나풀로, 때로는 취재를 거부하는 언론사의 기자로 오해받는 경우는 종종 있는 일이지만 이렇게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고 근본적인 질문을 스스로 하게 만드는 말은 처음 들었다. 아니라고 항변하고 싶었지만 뭐가 아닌지 딱히 꼬집어 해명할 수 없는 상황에서 결국 어찌어찌 벗어나긴 했지만 충격은 오래 갔다. 고통스런 모습조차 어쨌든 자기 마음에 들도록 찍는, 객관의 가면 뒤에 숨어 주관의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사진 찍는 일의 어려움이 밀양에서 더더욱 커졌다.


 고통스런 장면은 고통 받는 사람뿐만 아니라 찍는 사람한테도 알게 모르게 상처를 준다. 밀양에서 사진을 찍는 일의 어려움도 커졌지만 국가 폭력의 모습과 그렇게 싸웠음에도 결국엔 하나 둘 계속 올라가는 송전탑을 찍으면서 정신도 지치고 무뎌졌다. 사진에 찍히는(사실은 찍는) 송전탑과 전깃줄의 비중이 점점 높아지면서 심드렁하게 셔터를 누르거나 이 싸움은 끝나가는구나 생각하고 있을 때 밀양 주민들은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며 ‘시즌2’를 선언하기도 하고 ‘탈핵’으로 큰 방향을 잡고 핵발전소와 송전탑 문제 지역을 찾아다니는가 하면 ‘72시간 송년회’라는 이름으로 온 나라 곳곳에서 싸우고 있는 현장을 방문해 손을 맞잡기 시작했다.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의 손을 놓아 버린 대법원에서는 마치 자기 일처럼 온 힘을 다해 판결의 부당함에 항의하며 눈물을 흘렸고, 스타케미칼 고공농성장에서는 도착해서 굴뚝이 보이자마자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안산에서는 세월호 가족들을 만나자마자 부둥켜 안고 눈물을 흘렸고, 케이블 노동자들이 고공농성하던 서울의 광고탑 아래에서는 착한 사람들이 왜 저래야 하느냐며 안타까운 눈물을 흘렸다. 우연찮게 밀양 주민들의 그런 발걸음을 쫓아다니다 보니 그동안 밀양의 경우처럼 마음이 불편해서 사진 찍은 곳들이 결국 모두 하나로 이어져 있었고, 그것은 어렵기도 하지만 왜 찍느냐는 물음에 말이나 글을 대신하는 답이 될 것도 같다.


 10년이라는 세월은 짐작도 하지 못했다. 이렇게 무심할 수가 있나 싶은 생각도 들었고 외진 산 속에서 싸우고 있던 모습이 그려지면서 쌓이고 쌓인 세월의 두께, 그 깊은 외로움도 머릿속으로만 떠올렸다. 무심했던 세월만큼 부족함을 느꼈다. 능력의 부족이야 말할 것도 없고 무심함의 결과인 기록의 부족함이 절실했다. 10년의 세월을 놓고 보면 일부를 제외하곤 후반 3년 송전탑 싸움의 정점에 대부분의 사진이 집중돼 있다. 3년의 시간 속에서는 부재의 현장을 누군가 채워줄 수도 있었지만 나머지 시간은 없으면 없는 일이었다. 사진이 진실만을 말하지는 않지만, 그곳에 없으면 사진도 없다는 것만큼은 진실이다. 그 진실이 밀양에서는 안타까운 진실이 됐다. 송전탑들을 잇는 전깃줄과 같이 밀양 10년의 모든 사건과 장면을 사진으로 이어주기란 불가능하다. 여전히 살던 곳에서 살아가고는 있지만 파괴된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삶을 어떻게 사진으로 담을 수 있을까. 날마다 산 속에서 도로에서 고샅에서 벌어지던 치욕과 폭력의 기억들을 사진은 만 분의 일이라도 담을 수 있었을까. 카메라를 놓고 삽질과 바느질을 하기도 하고 감을 따거나 생수병을 이고 지며 산을 올랐던 기억들은 또 어떻게 할까. 그래서 사진으로 밀양 투쟁 10년을 말하는 책이지만 사진으로만 말할 수는 없는 책이다. 집중된 기억이, 보이진 않지만 지나온 10년의 흔적들을 짐작하게 할 것 같다. ‘10년’이라는 상징이 우리에게 그냥 지나치지 않고 기억들을 정리하게 만들었지만 이것으로 끝은 아닐 것이다. 최근 3년이 밀양 투쟁에서 정점이었다고 여기는 사람이 많겠지만 송전탑를 뿌리째 뽑아버리고 탈핵 세상을 만들겠다는 밀양 주민들을 보면서 진짜 정점은 아직도 멀리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곳으로 가는 길은 승리의 길, 따뜻한 연대의 길이 될 것이고 무너진 공동체를 되살리는 길일 것이다. 


손전등을 켜고 둘러앉아 밥을 먹던 101번 농성장의 아름다운 밤이 생각난다. 취재를 하러 왔는지 예술을 하러 온 건지 뭐 하는 사람들인지도 몰랐을, 카메라를 든 우리에게 따뜻하게 곁을 내준 밀양 주민들. 그분들의 고통에 카메라를 그렇게 바싹 들이댈 권리가 우리에게 있었을까 싶다. 마음의 빚을 덜어내기엔 턱없이 부족하지만 10년의 자리를 빌어 그 사진들 일부를 돌려드리는 것으로 고마운 인사를 드리고 싶다.


『밀양, 10년의 빛 (Listen to the City, 2015)』들어가는 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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