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의 송 
외박_고공농성과 한뎃잠


[여는 글1] 조세희 소설가


정택용을 본 지도 꽤 오래되었다. 건강이 허락되던 때 나도 카메라 가방을 메고 거리와 광장으로 나갔었다. 노동자, 농민, 빈민, 여성, 장애인 등 우리 시대 소수자들이 다른 꿈을 얘기하는 현장들이었다. 어느 정도 사진을 찍고 나서 집회장 어느 후미에서 ‘동료이자 선배 사진가’들인 노순택과 정택용이 가져 온 맥주 한 캔으로 목을 축이던 때가 그립다. 물대포와 최루액을 흠씬 뒤집어 쓴 적도 많다. 카메라를 들이대고 더 다가가야 할 폭력의 현장에서 나도 모르게 멈칫거리며 뒤로 물러나는 나를 볼 때도 있었다. 앵글을 들이대기에 앞서 분노와 슬픔이 먼저 치솟아 ‘이래선 안 된다고, 당신들은 지금 우리들의 어떤 믿음과 미래를 죽이고 있다’고, 카메라라도 내던지며 항의하고 싶던 현장들.


[여는 글2] 잠의 송 


안동 조탑리의 작은 집 문지방 건너편에서 권정생 선생은 당신을 찍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당부했다. 자기 같은 사람 찍지 말고 더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을 찍으라고. 가냘프게 말하고 있는 선생의 말간 눈을 보는 내내 사진을 찍고 싶어 갈등했다. 그렇게 머뭇거리는 사이 선생은 문을 닫고 사라졌고, 섬돌 위에 놓인 검정 고무신, 마당 돌 틈에 납작 핀 민들레, 빨랫줄에 덩그러니 걸린 검정 양발 한 켤레, 무너질 듯 위태롭게 쌓인 책들과 함께 놓인 빈 막걸리 두어 병만 찍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기침이 낳으면 그때 다시 만나자던 선생은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낮은 곳을 찍으라던 선생의 말씀이 잊히지 않았다. 그때 선생이 낮은 곳이라며 예를 들어 말한 건 청소부였다. 나중에 청소부의 고단한 삶을, 알지도 못하지만 어렵지 않게 찍을 수 있는 여건이 됐어도 왠지 선생의 말이 마음에 걸려 찍으러 나설 수가 없었다. 청소부만 보면 그날 선생의 기침 소리와 말간 눈이 떠올랐다. 낮은 곳 대신 높은 곳을 찍기 시작했다. 하늘로 오르는 사람들. 사람들은 흔히 고공농성이라고 말했다.